[오렌지 없는 오렌지]#3 머리 맡에 두고 한 모금씩 / 문진희

2022-04-15


지난겨울 가장 잘 샀다고 자부하는 물건이 하나 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길이의 실내용 양털 부츠다. 나는 겨울이 오고감을 손발의 온도로 가늠하는 수족냉증 인간.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수면 양말을 거부해 오던 중,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이 부츠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귀여운 모습에 반해 겨울이 오기 한참 전 부츠를 구매했다. 발이 차가워질 날이 기다려질 정도였다.


과연 방한 기능은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이렇게 귀엽기까지 하다니! 겨우내 부츠는 나와 한 몸이었다. 재택근무를 할 때도, 잘 때도 함께였다. 부츠를 신고 누우면 몸을 뒤척이다 이불 밖으로 발이 빼꼼 삐져나와도 걱정 없었다. 이쯤 되면 내 나이트 캡은 양털 부츠가 아닐지?


'나이트 캡'이란, 잘 때 쓰는 챙이 없는 모자를 뜻한다. 자는 동안 체온을 유지해주고 머리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모자. 그러나 내가 이 단어를 알게 된 계기는 어느 술집의 메뉴판에서였다. '이 술은 잠들기 전 나이트 캡으로 마시기 좋습니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여러 술을 탐구하던 때, (지금도 그렇다.) 맛이 아닌 상황에 대한 묘사로 술을 소개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와 저장한 단어. 친구들과 왁자지껄 마시는 술도, 윤기가 좌르륵 흐르는 안주에 곁들이는 술도 좋지만, 하루를 복기하며 머리맡에 두고 한 모금씩 홀짝이는 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나는 마음에 드는 술을 만날 때면 "와, 이건 나이트 캡이네"라고 말하게 된다. 물론 조건이 있다. 안주 없이 술만 홀짝여도 충분할 것. 이를 닦지 않고 잠들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을 만큼 맛있을 것. 최근 나이트 캡 리스트에 추가한 술은 까데노치 와이너리의 와인 '아레스코'다. 호두 같은 고소함과 옅은 쌉쌀함, 약간의 스파이시함과 그윽한 위스키 향을 품은 술.


너무 맛있어 줄어가는 것이 아쉽고, 서서히 오르는 취기에 들뜨고, 깊어가는 밤이 애틋해진다. 곶감처럼 은근한 단맛을 품고 있어 술만 조금씩 홀짝여도 완전해진 기분이 든다. 단맛 때문에 이가 썩지 않을까 두렵지만 괜찮을 것이다. 더 다디단 부루펜을 한 모금씩 삼키고 잠들던 날도 별 문제 없었으니까. 사실 한 잔이 두 잔을 부르고 세 잔을 부르니 나이트 캡에 걸맞은 밤 보다는 취해 잠든 밤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밤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에겐 늘 술 마실 구실이 필요할 테니까.


ⓒ 문진희




문진희 @daljinhee

서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될 때 세상과 조금씩 오해를 풀어가는 기분이다. 그때 그거 뭐였지? 왜 있잖아… 말하고 싶은 단어만 쏙 빼고 모든 것을 기억하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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