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를 또 먹어요?]#6 한가로운 국민의 의무 / 만오데

2022-05-18


회사를 다닐 때보다 그만두고 난 후 더 바쁘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내가 타고나길 여유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주 유 씨'라는 소속 외엔 특별할 소속감 없는 이 시절을 지나치며 나는 모든걸 내 의도대로 택하는 호사를 누린다. 만나는 사람, 먹는 음식, 마주하는 일상의 순간들 모두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간의 범주 안에 둘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둘째 딸 보다 손이 더 가고 키우는 내내 웃기고 어이가 없었다는 큰 딸에게, 엄마는 아침 8시 30분이면 방 문을 열고 비트쥬스와 함께 한 마디를 건낸다. "출근은 안하니?" 이렇게 말하는 엄마도 바쁜 백수 딸내미의 8개월차 갭이어 일상에 어느덧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상에는 당연히 만두가 있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엄마와 향한 어랑만두집. '어랑'은 개마고원 꼭대기에 위치한 촌동네의 이름이다. 이곳에서 빚어내는 이북 만두는 뭐가 다를까? 방 중의 방, 만두방이란 곳에서 이모님 세 분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복주머니 모양의 만두를 빚어내시는 나른한 오후를 목격했다. '만두를 위한 방이라니. 멋져.' 언젠가는 나도 좋아하는 재즈를 크게 틀고 위스키를 마시며 만두를 빚을 수 있는 나만의 만두방을 꼭 하나 갖고 싶다. 물론 그 방을 유지하기 위해 평일에는 대감집 노예로 열심히 일해야 할 터. 슴슴한 양지 육수에 당당히 떠 있는 다섯 알의 복주머니 만두, 비지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두부, 숙주, 배추, 파가 잘 어우러진 것이 입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온다. 함께 나온 칼칼한 육개장 느낌의 후추 향 강한 국물에 잘게 잘려나온 만두와 버섯이 가득한 뚝배기 한 그릇도 시원하게 비워냈다. 


엄마는 "너를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이라며 마지막 남은 만두를 당신 쪽으로 가져가다, "아니야 이 집 만두는 복주머니 모양이니까 너가 먹어라. 이직 복 받게!" 라며 했던 말을 번복한다. 어느 점집에서 2022년 4월 딸이 이직할 것을 자신있게 점지했다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우리 엄마. 만두 한 알을 놓고도 쉼 없는 밀당으로 긴장감 넘치는 사이. 나는 엄마가 재미있다.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영화 <매트릭스> 속 네오는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운명이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네오의 일대기가 피로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세상에는 무조건 좋은 선택도 나쁜 선택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갭이어를 선택한 나에게는 직장인이던 시절과는 다른 차원의 선택과 책임의 매트릭스가 주어진다. 분명한건, 시온과 트리니티 중 고민 끝에 트리니티를 선택하고는 거침없이 직진한 네오처럼, 선택한 그 순간 일단 우리는 달려봐야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인류를 구할 의무와 책임이 없으므로, 일시중지나 되감기가 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나씩 해나가 보자. 그저 한가로운 국민의 의무를 매일매일 성실하게 해낸다는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 엄마는 이른 아침 종이신문에서 

91년생 양띠 운세를 확인한다.

"91년생: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때."

오늘 나의 운세는 전적으로 엄마편이다.



지금까지 만오데의 <만두를 또 먹어요?>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만두를 또 먹어요?>의 연재분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만오데 @mandoo_of_the_day

7년간 성실히 회사와 집을 오가다 ‘더 이상 이렇게는 싫어’를 외치곤 돌연 퇴사, 황홀한 갭이어를 보내고 있다. 지붕 아래 똑같은 만두와 돈까스가 없다는 생각으로 조선팔도를 뚜벅이로 먹어내고, 걸어내는 중이다. 배 빵빵 마음 빵빵한 풀자극의 시절이 퍽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하는 삶을 꿈꾸며 운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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