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년+6개월이나 살아놓고서 스스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민망하지만, 나는 '내가 어른 같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프리랜서라 출근을 하지 않고, 일도 비정기적으로 있으며, 결혼은 했지만 아이 계획은 없고, 운전도 하지 않는 등 어렸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어른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나름 꽤 즐기는 편이지만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소위 말하는 어른스러운 코스를 착착 밟아나가는 것을 볼 때면 '나, 계속 이래도 괜찮을까?' 같은 생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생각이 드는 건 드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어른스러운 삶"으로 진입할 시도까진 안 했었는데.
코로나가 길어지고 여러 일이 겹치자 슬럼프가 찾아왔다. 본의 아니게 무기력이 길어지니 어떻게든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안 해본 일이면서, 단기간에 일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답은 운전이었다. 운전엔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13년 만에 다시 잡은 운전대가 주는 쾌감은 상당했다. 핸들을 꺾으면 딱 꺾은 만큼 움직이고, 브레이크를 밟는 감도에 따라 차가 멈춰 섰으며, 공식을 외운 만큼 주차가 착 들어맞았다. 들이는 노력만큼 돌아오는 솔직한 결과. 딱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운전에 자신감이 붙은 시점이 마침 결혼 1주년이라 동거인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튼튼한 두 발을 믿었던 뚜벅이 시절은 대중교통에 기대느라 짐도 마음대로 못 챙기고 동선 짜는데도 여간 불편했는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지도 가득 맛집멋집 별을 찍어둔 뒤,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훌쩍 넘나들었다. 제주도 여행은 운전을 하는 게 진짜라던 말을 애써 무시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커다란 앞창 너머로 쏟아지는 제주도의 풍광, 원하는 곳을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점, 13년 만에 운전을 한다는 흥분까지 겹쳐 정말이지 행복했다.
운전을 통해 방문했던 식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김치복국으로 유명한 대도식당이다. 쎄련 된 플레이팅, 쾌적한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시원함' 하나만 따지고 보면 올해 먹은 음식 중 원탑이었다. 밀복과 김치가 들어갔다는 점만으로도 벌써 시원한데, 미나리, 무, 콩나물까지 잔뜩 들어갔으니 말 다했지. "이 친구는 시원하기 위해 태어난 음식 같네." 같은 실없는 농담이 절로 튀어나왔다. 포동포슬한 복어 살, 입 안에서 크림처럼 퍼지는 복어 이리, 양장피처럼 꼬들한 복어 껍질까지. 먹는 재미 또한 쏠쏠한 훌륭한 음식이었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크아"라는 탄성을 내뱉음과 동시에 깨달았다. 이것이 진짜 어른의 맛이구나. 혀가 델 정도로 팔팔 끓는 국물이지만 시원함을 느껴서? 노포의 매력을 제대로 즐기고 있어서? 아니. 이렇게나 시원하고, 마시자마자 해장이 절로 되는 쏘주의 절친 같은 국물을 술 없이 마셔야 한다는 것에서, 나는 비로소 어른의 맛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아아… 운전을 한다는 것은 큰 책임이 따르는 것이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히어로 무비 속 명대사의 참됨을 김치복국을 통해 깨달아버렸다. 본의 아니게 어른스럽게 즐길 수밖에 없었던 김치복국, 다음 여행 땐 '한 그릇 포장해서 어른스럽지 않게 즐기고 말테다' 라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며 식당을 나섰다. 역시 어른의 길은 쓸쓸하고 어려운 것이었어.


ⓒ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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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gomdolgoon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블랙아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켓컬리, SK, 삼성 등 다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33년+6개월이나 살아놓고서 스스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게 민망하지만, 나는 '내가 어른 같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프리랜서라 출근을 하지 않고, 일도 비정기적으로 있으며, 결혼은 했지만 아이 계획은 없고, 운전도 하지 않는 등 어렸을 때 막연하게 생각했던 "어른스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한 삶이고 나름 꽤 즐기는 편이지만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소위 말하는 어른스러운 코스를 착착 밟아나가는 것을 볼 때면 '나, 계속 이래도 괜찮을까?' 같은 생각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든다.
생각이 드는 건 드는 거고, 그렇다고 해서 "어른스러운 삶"으로 진입할 시도까진 안 했었는데.
코로나가 길어지고 여러 일이 겹치자 슬럼프가 찾아왔다. 본의 아니게 무기력이 길어지니 어떻게든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안 해본 일이면서, 단기간에 일상을 바꿀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답은 운전이었다. 운전엔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13년 만에 다시 잡은 운전대가 주는 쾌감은 상당했다. 핸들을 꺾으면 딱 꺾은 만큼 움직이고, 브레이크를 밟는 감도에 따라 차가 멈춰 섰으며, 공식을 외운 만큼 주차가 착 들어맞았다. 들이는 노력만큼 돌아오는 솔직한 결과. 딱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운전에 자신감이 붙은 시점이 마침 결혼 1주년이라 동거인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튼튼한 두 발을 믿었던 뚜벅이 시절은 대중교통에 기대느라 짐도 마음대로 못 챙기고 동선 짜는데도 여간 불편했는데 이번 여행은 달랐다. 지도 가득 맛집멋집 별을 찍어둔 뒤,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훌쩍 넘나들었다. 제주도 여행은 운전을 하는 게 진짜라던 말을 애써 무시했었는데 그 말은 사실이었다. 커다란 앞창 너머로 쏟아지는 제주도의 풍광, 원하는 곳을 제한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점, 13년 만에 운전을 한다는 흥분까지 겹쳐 정말이지 행복했다.
운전을 통해 방문했던 식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김치복국으로 유명한 대도식당이다. 쎄련 된 플레이팅, 쾌적한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시원함' 하나만 따지고 보면 올해 먹은 음식 중 원탑이었다. 밀복과 김치가 들어갔다는 점만으로도 벌써 시원한데, 미나리, 무, 콩나물까지 잔뜩 들어갔으니 말 다했지. "이 친구는 시원하기 위해 태어난 음식 같네." 같은 실없는 농담이 절로 튀어나왔다. 포동포슬한 복어 살, 입 안에서 크림처럼 퍼지는 복어 이리, 양장피처럼 꼬들한 복어 껍질까지. 먹는 재미 또한 쏠쏠한 훌륭한 음식이었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크아"라는 탄성을 내뱉음과 동시에 깨달았다. 이것이 진짜 어른의 맛이구나. 혀가 델 정도로 팔팔 끓는 국물이지만 시원함을 느껴서? 노포의 매력을 제대로 즐기고 있어서? 아니. 이렇게나 시원하고, 마시자마자 해장이 절로 되는 쏘주의 절친 같은 국물을 술 없이 마셔야 한다는 것에서, 나는 비로소 어른의 맛을 깨달아 버린 것이다. 아아… 운전을 한다는 것은 큰 책임이 따르는 것이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히어로 무비 속 명대사의 참됨을 김치복국을 통해 깨달아버렸다. 본의 아니게 어른스럽게 즐길 수밖에 없었던 김치복국, 다음 여행 땐 '한 그릇 포장해서 어른스럽지 않게 즐기고 말테다' 라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며 식당을 나섰다. 역시 어른의 길은 쓸쓸하고 어려운 것이었어.
ⓒ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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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 @gomdolgoon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블랙아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켓컬리, SK, 삼성 등 다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