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애환이 담긴 음식’ 또는 ‘영혼을 울리는 음식’의 의미로 쓰이는 소울 푸드. 그러나, 삶의 애환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보다 내게 소울 푸드란 ‘일이 유난히 힘들 때 당기는 음식’이다.
일이 끝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가고 싶지만, 거의 매일 지친 몸을 집까지 질질 끌고 간다. 심지어 금요일에도! 가끔은 그렇게 끌고 갈 힘도 없어서 이 몸을 움직이게 할 동력, 그러니까 땔감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퇴근길에 식당에 들러 혼자 밥을 먹는다. 재밌는 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일에서 어떤 갈증을 느끼느냐에 따라 유난히 당기는 음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첫 직장생활 당시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시민에게 정기후원을 제안하는 일인 동시에 수많은 거절에 적응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호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웃어야 했고 가짜로 웃을수록 내 영혼과 체력이 고갈되었다. 속 빈 강정은 가볍기라도 하지만 속 빈 사람은 오히려 몸이 무거워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속은 텅텅 비어버렸지만, 천근만근이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는 동네 카레 집에 가서 메뉴판도 안 보고 카레 우동을 주문했다.
갈색에 가까운 카레, 통통한 우동면, 거기에 수많은 토핑이 살짝 잠긴 채 김을 모락모락 내며 내게 다가올 때, 그제야 가출했던 영혼이 돌아오고 눈에 힘이 생기곤 했다. 토핑으로 소시지와 새우튀김을 넣어 한껏 풍부하고 화려해진 카레 우동을 한 입씩 먹을 때마다 입안이 가득 해지는 게 좋았다. 가득 찬 감각, 어쩌면 내가 카레 우동을 좋아했던 건 맛이 아니라 그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배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뇌를 작동시킬 힘이 생겨서 ‘그래, 역시 그만둬야겠지?’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다음 직장에 들어가니 또 다른 유형의 난관이 펼쳐졌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분위기 속에서 날 선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의 나는 마음에 생채기가 생겼다 싶으면 옥상에 올라가 애꿎은 의자를 발로 툭툭 차며 화풀이를 하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는 흔한 신입사원이었다. 그렇게 해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으면 도망치듯 퇴근하고 근처 덮밥집에 가서 연어 덮밥과 맥주를 먹었다.
연어 덮밥이 나오기 전에 일단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서 재빨리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곤 했다. 이어서 연어 덮밥이 나오고, 연어에 고추냉이를 조금 올려 밥과 함께 입에 넣고는 숨을 크게 내쉬며 “음~” 하고 맛을 음미했다. 뾰족뾰족한 사무실을 벗어나 부드러운 연어를 맛보는 게 하루 동안의 긴장을 푸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가시방석 같았던 하루하루를 견디느라 여기저기 상처가 난 신입사원은 숱하게 그 연어 덮밥을 먹으며 버텼다. 확신하건대 지금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연어 덮밥이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이래서 힘들고, 그러면 이 음식을 먹어야지!’ 하고 분석적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다. 일이 끝나고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을 먹여주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 본능적으로 당기는 음식이 바로 지금 내 영혼을 채워주는 음식인 것 아닐까? 우리의 몸은, 입맛은 생각보다 솔직하니까.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 날 유난히 힘들게 했을 때, 그때마다 주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자. 일의 슬픔과 음식 간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찾고, 여러분도 자신만의 소울푸드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ㅡ
정재민 @jam.in
먹고 마시기 위해 사는 사람. 직장인들이 슬기롭게 점심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점심 메뉴와 대화 소재를 추천해주는 뉴스레터 <슬기로운 점심시간>을 발행한다.
‘삶의 애환이 담긴 음식’ 또는 ‘영혼을 울리는 음식’의 의미로 쓰이는 소울 푸드. 그러나, 삶의 애환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보다 내게 소울 푸드란 ‘일이 유난히 힘들 때 당기는 음식’이다.
일이 끝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가고 싶지만, 거의 매일 지친 몸을 집까지 질질 끌고 간다. 심지어 금요일에도! 가끔은 그렇게 끌고 갈 힘도 없어서 이 몸을 움직이게 할 동력, 그러니까 땔감이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퇴근길에 식당에 들러 혼자 밥을 먹는다. 재밌는 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일에서 어떤 갈증을 느끼느냐에 따라 유난히 당기는 음식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첫 직장생활 당시 나는 거리를 지나가는 시민에게 정기후원을 제안하는 일인 동시에 수많은 거절에 적응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서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그리고 호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웃어야 했고 가짜로 웃을수록 내 영혼과 체력이 고갈되었다. 속 빈 강정은 가볍기라도 하지만 속 빈 사람은 오히려 몸이 무거워진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속은 텅텅 비어버렸지만, 천근만근이 되어버린 몸을 이끌고는 동네 카레 집에 가서 메뉴판도 안 보고 카레 우동을 주문했다.
갈색에 가까운 카레, 통통한 우동면, 거기에 수많은 토핑이 살짝 잠긴 채 김을 모락모락 내며 내게 다가올 때, 그제야 가출했던 영혼이 돌아오고 눈에 힘이 생기곤 했다. 토핑으로 소시지와 새우튀김을 넣어 한껏 풍부하고 화려해진 카레 우동을 한 입씩 먹을 때마다 입안이 가득 해지는 게 좋았다. 가득 찬 감각, 어쩌면 내가 카레 우동을 좋아했던 건 맛이 아니라 그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배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뇌를 작동시킬 힘이 생겨서 ‘그래, 역시 그만둬야겠지?’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다음 직장에 들어가니 또 다른 유형의 난관이 펼쳐졌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분위기 속에서 날 선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의 나는 마음에 생채기가 생겼다 싶으면 옥상에 올라가 애꿎은 의자를 발로 툭툭 차며 화풀이를 하고 화장실에서 눈물을 훔치는 흔한 신입사원이었다. 그렇게 해도 마음이 나아지지 않으면 도망치듯 퇴근하고 근처 덮밥집에 가서 연어 덮밥과 맥주를 먹었다.
연어 덮밥이 나오기 전에 일단 맥주를 벌컥벌컥 마셔서 재빨리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곤 했다. 이어서 연어 덮밥이 나오고, 연어에 고추냉이를 조금 올려 밥과 함께 입에 넣고는 숨을 크게 내쉬며 “음~” 하고 맛을 음미했다. 뾰족뾰족한 사무실을 벗어나 부드러운 연어를 맛보는 게 하루 동안의 긴장을 푸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가시방석 같았던 하루하루를 견디느라 여기저기 상처가 난 신입사원은 숱하게 그 연어 덮밥을 먹으며 버텼다. 확신하건대 지금의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연어 덮밥이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이 이래서 힘들고, 그러면 이 음식을 먹어야지!’ 하고 분석적으로 사는 사람은 아니다. 일이 끝나고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을 먹여주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 본능적으로 당기는 음식이 바로 지금 내 영혼을 채워주는 음식인 것 아닐까? 우리의 몸은, 입맛은 생각보다 솔직하니까.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 날 유난히 힘들게 했을 때, 그때마다 주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자. 일의 슬픔과 음식 간의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찾고, 여러분도 자신만의 소울푸드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ㅡ
정재민 @jam.in
먹고 마시기 위해 사는 사람. 직장인들이 슬기롭게 점심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점심 메뉴와 대화 소재를 추천해주는 뉴스레터 <슬기로운 점심시간>을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