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5월,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거대한 숫자를 체중계에서 만나고 말았다.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까지 많이 찔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음식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증이 커져 사진첩을 거슬러 올라가 봤는데, 거뭇거뭇한 한 메뉴가 반복해서 등장했다. 범인은 너구나, 쇼유 라멘!
올 초, 나는 제2의 파이프라인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티스토리 블로그를 열었다. 단순한 맛집 리뷰보다 스토리텔링이 들어가면 더 재밌을 것 같아 고민하던 중 마포구에 라멘집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발견했고, 포스팅으로 풀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는 <마포구 쇼유 라멘 투어!!> 국물 간의 중심을 간장으로 삼는다는 점은 같지만 가게마다 천차만별로 맛이 다르다는 점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 둘 라멘집에 가기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마포구의 모든 쇼유 라멘집을 격파한 것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녀왔지? 당황도 잠시, 체중계에서 만난 숫자가 단박에 납득이 갔다. 맛있는 곳은 포스팅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수차례 반복해서 갔으니 말이다.
오리를 우린 국물로 만든 쇼유 라멘부터 닭, 멸치, 바지락, 유자, 레몬, 와사비 등을 베이스로 한 재밌고 독특한 쇼유 라멘을 잔뜩 먹었지만 내 입맛에 가장 맞는 라멘은 ‘세상 끝의 라멘’의 ‘끝 라멘’이다. 예전부터 이 가게를 편애했는데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투어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이 곳의 끝 라멘이 더 훌륭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끝 라멘의 국물은 진한 간장이 가진 장점을 모두 담고 듯한 맛이다. 단맛, 짠맛, 감칠맛, 신맛에 진한 닭 육수의 풍미까지 모두 느낄 수 있고, 균형까지 잘 잡힌 완성도 높은 국물. 술로 비유하자면 보리로 만든 몰트 위스키와 각종 곡물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를 잘 섞어, 대중성 있게 풀어낸 블렌디드 위스키 같달까? 증류소의 개성을 듬뿍 담은 싱글 몰트 위스키나 물을 타지 않아 강렬한 맛을 지닌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에 비하면 얌전한(?) 맛이지만, 위스키라는 술이 가진 모든 매력을 균형감 있게 품고 있다는 점이 꼭 닮은 것 같다. 짠맛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국물이 너무 짠 게 아닌가?”라고 하기도 하는데, 특유의 두툼한 중면을 함께 먹으면 밸런스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존재감 넘치는 두께의 면발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면 짭짤했던 첫인상이 자연스럽게 탄수화물의 고소한 맛으로 바뀌는데, 두께가 얇은 세면에서 느낄 수 없는 그 충만한 감각을 정말 사랑한다.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순간마다 습관처럼 “살찔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편인데, 끝 라멘을 먹을 때만큼은 이 중얼거림이 외침으로 바뀌게 된다. “사장님 면 하나 추가요!”라고.
나름 진지한 다이어트 식단을 고수하고 있는 요즘, 가장 좋아하는 라멘에 대해 긴 글을 쓰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서 자꾸만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하루빨리 목표한 몸무게로 돌아가 세끝라에서 “면 추가요!”를 외치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김호
ㅡ
김호 @gomdolgoon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블랙아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켓컬리, SK, 삼성 등 다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2021년 5월,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거대한 숫자를 체중계에서 만나고 말았다. 짧은 기간 동안 이렇게까지 많이 찔 수 있다니. 도대체 어떤 음식이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증이 커져 사진첩을 거슬러 올라가 봤는데, 거뭇거뭇한 한 메뉴가 반복해서 등장했다. 범인은 너구나, 쇼유 라멘!
올 초, 나는 제2의 파이프라인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고 티스토리 블로그를 열었다. 단순한 맛집 리뷰보다 스토리텔링이 들어가면 더 재밌을 것 같아 고민하던 중 마포구에 라멘집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것을 발견했고, 포스팅으로 풀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는 <마포구 쇼유 라멘 투어!!> 국물 간의 중심을 간장으로 삼는다는 점은 같지만 가게마다 천차만별로 맛이 다르다는 점이 재밌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 둘 라멘집에 가기 시작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마포구의 모든 쇼유 라멘집을 격파한 것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은 곳을 다녀왔지? 당황도 잠시, 체중계에서 만난 숫자가 단박에 납득이 갔다. 맛있는 곳은 포스팅을 해야 한다는 핑계로 수차례 반복해서 갔으니 말이다.
오리를 우린 국물로 만든 쇼유 라멘부터 닭, 멸치, 바지락, 유자, 레몬, 와사비 등을 베이스로 한 재밌고 독특한 쇼유 라멘을 잔뜩 먹었지만 내 입맛에 가장 맞는 라멘은 ‘세상 끝의 라멘’의 ‘끝 라멘’이다. 예전부터 이 가게를 편애했는데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투어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이 곳의 끝 라멘이 더 훌륭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끝 라멘의 국물은 진한 간장이 가진 장점을 모두 담고 듯한 맛이다. 단맛, 짠맛, 감칠맛, 신맛에 진한 닭 육수의 풍미까지 모두 느낄 수 있고, 균형까지 잘 잡힌 완성도 높은 국물. 술로 비유하자면 보리로 만든 몰트 위스키와 각종 곡물로 만든 그레인 위스키를 잘 섞어, 대중성 있게 풀어낸 블렌디드 위스키 같달까? 증류소의 개성을 듬뿍 담은 싱글 몰트 위스키나 물을 타지 않아 강렬한 맛을 지닌 캐스크 스트렝스 위스키에 비하면 얌전한(?) 맛이지만, 위스키라는 술이 가진 모든 매력을 균형감 있게 품고 있다는 점이 꼭 닮은 것 같다. 짠맛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국물이 너무 짠 게 아닌가?”라고 하기도 하는데, 특유의 두툼한 중면을 함께 먹으면 밸런스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존재감 넘치는 두께의 면발을 입 안 가득 넣고 우물거리면 짭짤했던 첫인상이 자연스럽게 탄수화물의 고소한 맛으로 바뀌는데, 두께가 얇은 세면에서 느낄 수 없는 그 충만한 감각을 정말 사랑한다.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순간마다 습관처럼 “살찔 것 같은데…”라고 중얼거리는 편인데, 끝 라멘을 먹을 때만큼은 이 중얼거림이 외침으로 바뀌게 된다. “사장님 면 하나 추가요!”라고.
나름 진지한 다이어트 식단을 고수하고 있는 요즘, 가장 좋아하는 라멘에 대해 긴 글을 쓰자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서 자꾸만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하루빨리 목표한 몸무게로 돌아가 세끝라에서 “면 추가요!”를 외치는 날이 오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김호
ㅡ
김호 @gomdolgoon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블랙아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켓컬리, SK, 삼성 등 다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