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없는 오렌지]#2 오리 와인, 고양이 와인 / 문진희

2022-04-01



단어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 왜 이러지?' 하고 말하면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서라거나 술을 많이 마셔서 알코올성 치매가 시작된 거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어쨌거나 나는 단어를 정확히 떠올리고 싶어 친구들에게 뜻밖의 스무 고개를 출제하게 된다. 왜 우리 작년에 같이 본 영화 있잖아. 우주가 배경인데.. 너구리도 나오고.. 말하는 나무도 나오잖아.. 그 아홉 글자 영화 뭐지?


답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답이 아니라 글자 수 같은 걸 정확히 기억하는 것인지.. 숱하게 마신 와인들 역시 이름만 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특히 내추럴 와인에는 개성 있는 이미지가 인쇄된 라벨이 많아, 그 모양으로 와인을 기억해 부르게 된다. 귀여운 동물이나 식물, 작품 같은 그림 한 점이 인쇄되어 있기도 하다. 지역, 연도, 와이너리, 포도 품종 등의 정보가 빼곡한 텍스트 위주의 라벨보다 이미지가 더 기억하기 쉽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하게 된다.


- "이 고양이 와인 궁금했는데,

   와이너리 근처에 사는 야생 동물을 라벨에 그린 시리즈래."

- "강아지 와인 가져왔는데 같이 마시자! 

   라벨에 있는 강아지는 와인을 만든 사람의 반려견이래.

   어휴, 이러니 안 사고 배겨?"

- "지난 크리스마스 때 마신 오리 와인 맛있었잖아."


새가 그려진 와인 이름의 실제 뜻은 ‘작은 새'였는데, 마실 때 곁들인 오리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었던 탓에 이 와인을 오리 와인이라 부르게 된 거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이미지를 꺼내면 대화가 따라오고, 와인의 향과 질감이 차례로 생각난다. 그날의 웃음 포인트마저 떠올라 다시 웃기도 한다. 결국 이름만 빼고 다 기억했네. 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곤란할 건 없다. 마신 와인들은 모두 아이폰 메모장에 적어 두었으니까. 그저 함께 와인병을 비운 친구들과 같은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단어 하나만 통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 문진희




문진희 @daljinhee

서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될 때 세상과 조금씩 오해를 풀어가는 기분이다. 그때 그거 뭐였지? 왜 있잖아… 말하고 싶은 단어만 쏙 빼고 모든 것을 기억하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싶다. 

6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