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없는 오렌지]#6 인덱스를 붙여둔 페이지가 있다면 / 문진희

2022-05-27


일주일 만에 격리가 해제됐다. 결국 4월의 끝 무렵,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고 만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도 잘 수 있구나 싶은 만큼 오랜 시간을 잤다. 물론, 중간에 일어나 밥도 많이 먹고 약도 챙겨 먹었지만, 밤과 낮의 경계 없이 누워 있었다. 날씨조차 궁금하지 않던 며칠.


자다 일어나 보니 문득 5월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시간은 드라이아이스처럼 있었는데 사라져버렸다. 이제야 뭔가를 좀 앉아서 해볼 기력이 생겨 슬금슬금 일어나 사진 정리를 시작한다. 응? 갑자기 사진 정리라니 뜬금없지만. 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쉬어버린 일주일을 난데없이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서다.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일 때 나는 잊고 싶지 않던 지난날을 꺼내어 본다.


사진은 책 사이에 붙여두는 인덱스다. 무수한 페이지가 내가 살아가는 날들이라면 그중 기억하고 싶은 구간은 언제든 다시 볼 수 있게 붙여두는 거다.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처음처럼 읽기는 힘드니까. 특히 여행 인덱스가 붙은 구간은 언제나 흥미롭다. 여행과 처음 맛본 것의 카테고리가 합쳐진 순간이라면 더더욱.


5년 전 도쿄 여행 사진에는 내추럴 와인을 처음 맛본 내가 있었다. '인프피'는 구글 지도 어플에 가보고 싶은 곳을 별로 그득 찍어두고 계획은 충분하다며 만족하는 인간. 그중에도 내 눈에 가장 크게 보이는 별은 '아히루 스토어'라는 와인 바였다. 남매가 운영하는 이 가게는 낮엔 직접 구운 빵을, 저녁엔 요리와 내추럴 와인을 판매한다고 했다. 당시 내추럴 와인이 뭔지도 몰랐지만 어플을 통해 본 사진과 짧은 영어 후기는 날 부르고 있었다. 여길 분명 좋아하게 될 거라고.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가게에는 몇 팀이 줄을 서 있었다. 아무도 여행자로 보이지 않는다. 이로써 만족할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현지인들에게 인기 있는 가게 같아! 평소 웨이팅을 잘 안 하는 나도 오늘 저녁만큼은 고집을 부리고 싶다. 가랑비가 내려 옷이 약간 젖었지만 개의치 않을 정도다. 약 40분을 기다려 입장했고, 큰 와인 케그이자 스탠딩 테이블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오픈 바에서 분주하게 요리하는 스태프들, 그 모습을 보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바 테이블 손님들, 다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벽 쪽 테이블의 우리. 바로 뒤 테이블에 서 있는 사람의 등과 내 등이 서로 닿을 듯한 작은 가게였지만 그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자 이제 시작해볼까. 점찍어둔 메뉴를 빠르게 주문했고, 술은 추천을 받기로 했다.


"오스스메와 난데스까?(=추천 메뉴가 무엇인가요?)". 이 문장은 누구보다 유창하게 구사 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스태프의 답변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 "음, 내추럴 와인.. 오렌지..?" 스태프는 우리가 여행자인 것을 눈치채고는 와인병 서너 개를 들고 왔다. 내추럴 와인이자 오렌지색은 충족했으니 원하는 라벨을 골라보자. 그렇게 끌리는 감각에 기대어 마셔본 첫 내추럴 와인. 궁금한 길로 걸어가 보는 여행과도 닮았지. 


'한국에는 왜 내추럴 와인이 없지? 이런 가게 생기면 진짜 대박 날 텐데!' 라는 외침과 감탄으로 행복한 밤을 보냈다. 만일 내가 돌아오자마자 내추럴 와인 바를 차렸다면 성공했을까? 하지만,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채로 남겨두고 싶다. 그 후로 나는 아히루 스토어의 단골이 됐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여행 때마다 찾는 곳이라면 단골 아닌가요. 코로나 창궐 이후 3년 동안 못 갔지만 고맙게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만간 찾아갈게. 


앞으로 펼쳐보게 될 페이지에도 언제고 들여다볼 수 있는 인덱스를 많이 붙여 두고 싶다. 아니, 새로운 것에 감탄하며 인덱스를 붙이는 마음을 오래도록 갖고 싶다.


ⓒ 문진희



지금까지 문진희의 <오렌지 없는 오렌지>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를 클릭하시면, <오렌지 없는 오렌지>의 연재분을 다시 읽으실 수 있습니다.




문진희 @daljinhee

서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될 때 세상과 조금씩 오해를 풀어가는 기분이다. 그때 그거 뭐였지? 왜 있잖아… 말하고 싶은 단어만 쏙 빼고 모든 것을 기억하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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