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리움의 음식]#6 완벽주의자의 초심 / 주혜린

2022-05-20



잠들기 전에 하는 작은 의식이 있다. 첫째, 내일 해야 할 일을 정리해 적어둔다. 일의 우선순위와 선호도에 따라 배분한다.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우선순위로 둔다. 둘째, 하루간 일을 하며 어질러져 있던 책상을 정리한다. 읽던 책 사이에 아무렇게 꽂아두었던 필기구 대신 책갈피를 끼워 넣고, 내일 또 읽어야 할 책이라면 책상 위의 책꽂이에 꽂는다. 그렇지 않다면 책상과 가장 가까이 있는 책장에 꽂는다. 랩탑 화면을 알코올 솜으로 닦고 마른 소창 손수건으로 닦아준 뒤, 랩탑의 키보드 위에 종이 한 장을 넣어 닫는다. 따로 연결해서 사용하는 블루투스 키보드와 마우스도 가볍게 닦는다. 충전해야 할 전자 기기는 충전기를 연결한 뒤, 사용한 텀블러를 닦으러 가는 길에 소창 손수건에 물을 묻혀온다. 마지막으로 책상을 닦아주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셋째, 바닥을 청소한다. 늦은 시각이라 청소기를 돌릴 순 없기 때문에 마른 걸레를 이용해 먼지와 머리카락만 정리한다. 의자까지 한 번 닦아주면 의식은 종료된다.


잠에서 깨어나서 하는 작은 의식도 있다. 오전 5시에서 5시 30분 사이에 일어난 후, 첫째, 침구를 정리하고 미지근한 물을 마신다. 둘째, 창문을 열어 새벽 공기를 마신다. 창문을 열면 바로 앞에 2차선 도로가 있는데, 공기의 질이 썩 좋지 않으므로 아직 활동이 시작되지 않은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실컷 맡아둔다. 이후 바닥에 앉아 몸을 주무르기도 하고 스트레칭을 한 뒤, 잠들기 전에 적어둔 할 일 목록을 확인한다. 그리고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먼저 시작한다. 날이 밝기 전 또는 아침을 챙기기 전에 끝내두면 하루가 아주 가뿐하다. 아,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우울감인지 번아웃인지 알 수 없는 감정 때문에 가끔 푹 가라앉는 날이 오는데, 이런 날이면 계획해둔 일에 차질이 생기곤 했다. 그래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블루 데이'에 대한 솔루션을 찾다가 감사 일기를 작성해보게 됐다.


영화 <안드레와 올리브나무>(2020)는 완벽주의자인 안드레 치앙 셰프의 철학이 담긴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싱가포르에서 자신만의 확고한 8가지 철학인 ‘옥타필로소피(Octaphilosophy)'를 기반으로 운영하던 미슐랭 가이드 투스타의 '레스토랑 안드레'를 돌연 폐점하기로 결정한다. 미슐랭 가이드의 별점과 아시아 50 베스트 상 반납을 감수하며 말이다. 안드레는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하게 됐을까? 팀원들과의 관계, 음식에 대한 철칙, 새로운 메뉴에 대한 구상 등, 그는 일에 관해 여러가지를 신경 쓰면서도 가장 신경써야 했을 것에 무심해왔다. 그건 바로 자신의 '영혼'이었다. 


레스토랑 입구 앞에 있는 올리브 나무는 안드레의 선택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안드레는 어릴 적부터 프랑스 남부 지방에 살았는데, 그 지역에는 어디를 가든 올리브 나무가 있었다. 자신의 방 창문으로도 올리브 나무가 보였고 언제나 그 풍경과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안드레는 싱가포르에 올 때 자신의 마음을 지켜주던 친구인 올리브 나무를 데려 온다. 안드레와 올리브 나무는 서로 닮은 구석이 많다. 따뜻한 지역에서 난 올리브 나무는 추위와 건조한 환경에서도 제법 강한데, 수분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잎을 떨어뜨리는 일 없이 잘 견딘다. 또한 한 번 내린 뿌리는 굵고 튼튼해 쉽게 마르지도 않는다. 올리브 나무의 한결같은 우직함은 진정한 완벽주의자인 안드레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비뚤어짐 없이 오와 열을 맞추고 설정해둔 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변을 관리하는 고통을 동반하는 완벽함이 아니다. 자신과 주변의 영혼을 살피고 마땅히 믿고 지지하는, 다정한 완벽함인 것이다. 


레스토랑 안드레를 폐점하고 새로운 설렘으로 이끈 그의 '초심'은 자정 능력과도 같다. 맨 처음의 마음을 지녔던 때로 돌아가 노력하게 하고 순수해지게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초심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무엇을 하고자 했으며, 어떤 의도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요즘 아침마다 감사 일기를 쓰는 건, 그 첫 마음으로 돌아가보고 싶기 때문이다. 잊고 있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꼬박 고민해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 레스토랑 안드레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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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린 @sandwichpress.kr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의지가 이끄는 것을 수집하고 탐구하는 출판사 샌드위치 프레스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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