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 없는 오렌지]#5 술이 열리는 시간 / 문진희

2022-05-13



꾸준한 음주 생활 동안 술 마시며 성장한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와, 나 잘 마시네?' 주종을 섞어도 좀처럼 취하지 않는 나를 발견했을 때. 병 단위로 술을 쟁여두는 나를 깨달았을 때. 술을 남기고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


가장 최근 성장점을 느낀 순간은 한 병의 와인을 나눠 마실 때였다. 1화에 소개했던 나의 단골집 '윈비노'에 갔다가 오래 두고 관찰하며 마시기 좋다는 이야기에 사 온 것이었다. 위스키는 여러 날에 걸쳐 마셔봤지만 와인도 가능하다고? 호기심이 생겼다.


어느 저녁 나와 동거인은 자못 진지한 마음으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이 와인을 이제 세 번에 걸쳐 마셔 보자. 오늘 다 비우지 않기로 해. 잔에 경건하게 와인을 따르고 숨을 고른다. 이쯤 되면 단순한 유희가 아닌 듯 보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에게는 새 술을 따서 맛보는 일이 큰 즐거움이다.


고요하게 한 모금을 들이켠 둘은 새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더 많은 것들을 발견하려고 끝말잇기처럼 말을 이어간다. 와, 정말 이야기해주신 것처럼 오렌지 마멀레이드 향이 나네! 내가 좋아하는 우디한 느낌도 있다, 숲속에서 피톤치드를 마시는 기분이야. 약간 요거트 뉘앙스가 있는 게 또 신기한데? 탄산감도 보글보글 기분이 좋다, 하고.


와인을 연 지 처음 와인을 맛 본 날 이후 셋째 날도, 다섯째 날도, 일과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와인잔을 두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셋째 날은 나무가 감싸는 듯한 향이 더 짙어졌네, 다섯째 날은 나무뿌리와 오렌지 나무가 열려 있는 풀밭 같아, 라고 말했다.


어떤 세계에 발을 담갔을 때, 그 세계의 언어를 알아가는 것을 좋아한다. 술의 세계에서는 ‘열린다'는 표현이 좋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이 열린다. 온도가 높아지고 공기와 만나며 맛과 향이 풍부해진다는 뜻이다. 기꺼이 그 세계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도 열린다. 이런 술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문진희




문진희 @daljinhee

서울에서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몰랐던 이야기를 알게 될 때 세상과 조금씩 오해를 풀어가는 기분이다. 그때 그거 뭐였지? 왜 있잖아… 말하고 싶은 단어만 쏙 빼고 모든 것을 기억하곤 한다.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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