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그리움의 음식]#5 혀끝에 기록된 맛 / 주혜린

2022-05-06


학창 시절을 보냈던 동네는 지금 사는 동네로부터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너 10분 정도 곧장 걸으면 된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동이 달라서 그런지 미묘하게 다른 동네의 느낌을 받는다. 아, 갑자기 옛 동네에 들른 이유는 등산하며 다쳤던 발목 인대 때문이다. 고질적으로 변한 통증을 치료하려 용하다는 한의원을 소개받았는데 그곳이 마침 옛 동네에 있어 살살 걸어가 보게 되었다. 동네는 그대로였다. 아주 어릴 때 네발 자전거를 연습하던 공터, 조금 더 커서는 두발 자전거로 경주하던 아파트 뒤편의 주차장, 절망스러운 성적표를 받고 차마 집으로 들어가지 못해 앉아있던 벤치. 낡았지만 여전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듯한 동네의 모습에 저릿한 발목을 핑계로 더욱 천천히 걸었다. 


등하교하며 지나다녔던 오래된 아파트 상가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쿰쿰한 듯한 냄새 사이로… '어, 달달한 떡볶이 냄새? 여기에 떡볶이 가게가 있었던가?' 교실 하나 크기 정도 되는 좁은 1층을 둘러보았지만, 주변은 부동산과 임대 쪽지가 붙은 공실뿐이었다. 방금 코끝에 떠올랐던 냄새로 당장 스치는 기억을 더듬었다. 학교 앞에서 사 먹던 낭낭한 케첩 맛의 컵볶이, 손가락 끝에 흐를 정도로 소스가 담뿍 묻었던 매콤달콤 떡꼬치,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에 친구와 함께 도망 나와 맥도날드 한 켠에서 먹던 스낵랩, 바스러진 조미김을 꼼꼼히 입은 둥그렇고도 큰 참치 김치 주먹밥의 맛을 말이다. 어째 죄다 먹는 것만 떠오른다는 것에 웃음이 나면서도 그만한 맛을 느낀지 꽤 되었다는 사실에 씁쓸해지던 참이었다. 오죽했으면 음식 냄새를 떠올렸을까. 기억 속의 한 장면에 가장 깊게 추억된 것은 그때 그 순간의 맛과 감정이었다. 어쩌면 나는 혀끝에 기록해두고 있던 게 아닐까.


영화 <레이버 데이>(2013) 속 복숭아 파이도 헨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맛이었을 테다. 헨리는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게 된 어머니 아델과 단둘이 살고있다. 마트에 간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탈옥수 프랭크는 잠깐이라도 쉴 곳이 필요하다는 부탁을 하며 은근히 그들을 위협한다. 어쩔 수 없이 세 사람은 함께 집으로 향하게 되고, 프랭크는 자신을 쉬게 해준 모자에게 보답하고자 각종 요리 및 집 수리 등 손길이 닿아야 하는 부분을 척척 해낸다. 알고 보니 프랭크에게도 아내의 외도에서 시작 된 기구한 사연이 있었고, 각자의 감정이 어우러져 노동절 연휴를 함께 보내게 된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복숭아 파이를 만들어 먹는다. 세 사람이 단란하게 모여서 말이다. 세월이 지나 제빵사가 된 헨리가 만든 복숭아 파이는 유명세를 얻게 되는데, 그 파이는 프랭크와 아델의 소원해진 사이를 다시금 이어준다.


영화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에서 피터가 사 먹는 5달러짜리 샌드위치에도 특별한 맛이 있다. 피클을 넣어 납작하게 만든 샌드위치는 그가 '당신의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업무를 끝내고 먹는 꿀맛 같은 식사인데, 먹는 장소 역시 한몫한다. 해가 질 때쯤, 높은 곳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느긋하게 흔들며 한 입 베어 물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샌드위치보다 감격스러운 맛이 느껴질 텐데, 나야 맛부터 먼저 생각하고 말았지만, 피터에게 있어 5달러 샌드위치는 단순한 식사를 넘어선 일종의 다짐과도 같아 보였다. 


잊어버릴 법한 기억을 되살리는 혀끝의 기록은 입 안에 넣고 굴려야만 단맛을 퍼트리는 사탕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기록은 나를 그 시절의 장면으로 데려가 그때의 사람과 장소를 만나게 한다. 참, '맛'은 유효기간이 제법 긴 기록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옅은 웃음도 나왔다. 옛 동네에서 마주한 오래된 상가는 자극적이고 매운맛의 떡볶이의 맛에 단련된 나에게 달달한 울림을 주었다. 언제든 그리울 때면 생각해내도 좋다는 듯.


ⓒ IMDB




주혜린 @sandwichpress.kr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의지가 이끄는 것을 수집하고 탐구하는 출판사 샌드위치 프레스를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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