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꽂히고 말았다]#5 촉촉하고 우아한 기다림의 맛, 헤네시 메론 / 김호

2021-08-13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가 반칙 같은 사진을 발견했다. 플레이팅만 예쁜 인스타그래머블한 사진에 익숙해져서 웬만한 음식 사진으로는 잘 설레지 않는데 이 사진은 보자마자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가는 것 같았다. 텍스트까지 읽고 나니 간까지 두근거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고.


사진의 주인공은 메론이었다. 그냥 메론은 아니고, 잘 후숙한 메론을 반으로 가르고 속살을 파낸 다음 헤네시 V.S.O.P를 붓고 메론과 다른 과일로 장식한 그런 메론. 텍스트만 봐도 호사스러운 어른의 화채 ‘헤네시 메론’이었다. 과거 일본 버블 시절 때, 긴자의 바에서 유행했다는 멋스러운 스토리까지 품고 있는 호방한 칵테일. 이거야말로 맛없없º 이 아닐까. 그 길로 곧장 메론부터 주문했다.

º '맛이 없을 수가 없다'의 줄임말.


헤네시 메론의 핵심은 후숙이라고 한다. 메론을 사서 아무 생각 없이 먹었던 적은 많았지만 흐물흐물할 정도로 후숙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메론의 아래쪽, 평평한 곳이 메론의 배꼽인데, 여기를 눌렀을 때 말랑말랑해지면 충분히 후숙 된 것이라고 했다. 빨리 호사를 누리고픈 마음에 하루가 멀다 하고 배꼽을 찔러봤다. 이틀, 사흘, 일주일… 이 친구는 배꼽에 철판을 깔았나? 당최 말랑해질 기미조차 안 보였다. 처음 찔러볼 땐 두근거리는 마음이 컸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의 심정으로 아침저녁으로 찌르고는 했다.


나의 끈기에 지쳤는지, 아니면 때가 됐는지 꼬박 2주가 지나서야 메론 배꼽이 말랑해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보니, 이제 딱 맛있을 정도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적당량을 파내고 꼬냑을 채운 뒤, 과일 통조림으로 장식해 완성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할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달콤한 메론 과즙과 헤네시는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우아한 실크 같이 부드러운 단맛을 냈고, 중간중간 건져먹는 메론과 과일 통조림도 촉촉한 악센트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기다린 시간을 넘치도록 보상해주는 행복의 맛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즐기던 술자리, 눈치 보지 않고 떠났던 여행, 건강 걱정 없이 만나는 가족들.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코로나 때문에, 나에게 확실한 행복을 주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지내던 2021년 7월. 딱 지금 헤네시 메론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딱딱했던 메론이 부드럽고 촉촉한 행복의 맛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지금의 지난한 시간도 확실한 행복들로 곧 돌아오겠지?


ⓒ김호


김호 @gomdolgoon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블랙아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켓컬리, SK, 삼성 등 다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