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꽂히고 말았다]#4 지난 여름의 은인, 참깨 소츄 / 김호

2021-07-23



"와-! 여름이다!!" 대한민국 여름의 캐롤 '해변의 여인'에서 쿨의 김성수는 몇십 년째 신나게 외쳐대던데… 나는 더위와 습도에 너무나 취약한 인간인지라 여름만 되면 신이 나긴커녕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린다. 여름이 시작되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편인데, 올해는 특히나 인생 최대의 몸무게까지 찍은 상황이니 아마 95% 이상 방콕 하며 보낼 것 같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 에어컨 아래에서 작년 여름은 어떻게 버텼더라? 곰곰이 생각해봤다.  


평소 기억의 대부분을 사진첩에 외주 주고 있기 때문에 역시나 사진첩을 거슬러 올라가 봤는데, 작년 이맘때의 사진을 보고 죄책감이 쏟아졌다. 2020년 여름, 역대급 장마와 더위를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줬던 은인과 같은 술, 베니오토메 쿠로. 그렇게 좋아해 놓고서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다른 술에 정신이 팔려 은인(?)을 잊고 있었다는 점에 큰 죄책감이 몰아쳤다. 그래서 결심했다. 업테이블의 한 꼭지에 소개해야겠다고!


베니오토메 쿠로는 참깨 소츄º 로 유명한 후쿠오카의 한 양조장, 베니오토메에서 만드는 술이다. 사실 참깨는 단독으로 술을 만들 수 없는 재료인데, 새로운 소츄를 만들고자 했던 양조가 '하야시다 하루노'는 여러 시행 착오 끝에 쌀과 보리, 참깨를 배합하여 참깨 향을 가득 담은 소츄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º 소츄: 곡물을 발효한 뒤 증류해서 만든 술


국내에 수입되는 참깨 소츄에는 일반 참깨를 이용해 만드는 "베니오토메"와 검은깨(흑임자)를 넣어 만든 "베니오토메 쿠로" 제품이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술은 ‘검은’이라는 의미가 붙은 쿠로 제품이다. 일반 술에서 보기 힘든 팔각형의 각진 어깨와 검은 외관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맛 역시 강렬한 외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곡물을 살짝 태운 듯한 기분 좋은 훈연 향과 고소하지만 여러 잔 마셔도 느끼하지 않은 참깨 향, 입맛을 돋우는 곡물의 맛까지, 참깨의 온갖 매력을 넉넉하게 갖춘 술이다. 그냥 마셔도 좋고 얼음을 넣어도 존재감이 죽지 않으며, (토닉이 아닌) 탄산수를 섞어 하이볼로 마시면 청량한 맛까지 가미되어 더욱 훌륭해진다.


베니오토메 쿠로의 가장 큰 장점은 페어링이다. 보리와 참깨가 들어가서인지 한, 중, 일 등 대부분의 아시안 푸드와 훌륭한 궁합을 자랑한다. 평소 주종을 가리지 않고 신상 술을 마시기 때문에 (재정 형편상) 똑같은 술을 재구매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이 친구는 작년 여름 동안만 750ml 4병이나 마셨다. 쓰다 보니 너무 칭찬만 적는 것 같아 괜히 "광고 아님"이라도 써붙여야 할 것 같은 데… 진짜 광고가 아니다. 


굳이 단점을 적어보자면 접근성과 가격 정도가 있겠다. 일단 소츄 전문 이자카야가 아닌 이상 베니오토메 쿠로 제품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는 혜화역에 위치한 수입사 '니혼사케'에서 이 술을 구입했는데, 당시 사장님께서 마지막 남은 박스를 첫 구매가 99,000에서 할인 구매가 59,400로 할인 판매 하셨다. 원체 맛있는 술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할인하고 있으니 당연히 품절됐겠지 싶어 나도 자연스럽게 잊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며 오랜만에 연락드려보니, 아직 재고가 있으며 여전히 할인가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셨다. 


물미역처럼 흐느적거리던 여름철, 나의 허리를 꼿꼿이 세우도록 도와준 은인 같은 술 베니오토메 쿠로! 평소 소츄를 좋아하는 분, 반주를 즐기시는 분, 스모키한 향의 아일라 위스키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더더욱 드셔 보시길 추천드린다.


P. S. 쿠로가 아닌 일반 베니오토메 제품은 이자카야에서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핑크색 라벨 위에 또랑한 눈을 빛내는 여성이 일러스트로 그려진 제품이다. 애주가의 필독서 <술 취한 식물학자>의 저자가 이 술을 소츄 계의 '성배'로 표현할 정도이니, 제가 굳이 더 말을 안 보태도 되겠죠?


ⓒ김호


김호 @gomdolgoon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러스트레이터. 일러스트레이션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튜디오 블랙아웃'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마켓컬리, SK, 삼성 등 다수의 클라이언트와 함께 작업했습니다. 2015년 독립출판으로 『맥주도감』을 펴낸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술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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