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롭거나 말거나]#4 P형 인간이 J형 인간이 되는 순간 / 정재민

2021-07-21


종종 퇴근길의 허기를 참지 못하고 회사 근처 백화점 지하의 식품관에서 이것저것 사 먹곤 했다. 그때마다 회전초밥집이 눈에 띄었다. 열을 맞춰 움직이고 있는 회전 초밥들, 호기심을 자극하는 접시들, 그리고 조용히 접시를 골라 먹는 사람들. 그 장면이 시끌벅적한 백화점 식품 코너와는 상반되어 힐끗힐끗 보게 됐고, 언젠가 나도 저 질서 정연하고 우아해 보이는 장면 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러다가 야근 수당을 받은 어느 날, 나는 그 회전초밥집으로 향했다. 그 집에 대한 평을 전혀 찾아보지 않은 채.


우선, 앉아서 흰살생선 초밥부터 골랐다. 그런데 맛이 없었다. 갸우뚱하며 다른 접시를 집어 들었는데, 또 맛이 없었다. 여기서 멈췄어야 하는데, '그럼 조금 비싼 접시는 다르겠지!'라는 허망한 기대를 품고 가격대를 높여가며 접시를 낚아챘다. 연이은 실패에 슬퍼하며 그래도 배는 채워야 하니 홀스래디쉬 소스와 양파, 그리고 케이퍼로 대충 맛을 감출 수 있는 연어 초밥을 두 접시쯤 더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먹고 난 후에 받은 영수증에 찍힌 금액은 내가 생각한 예산을 초과했기에 더더욱 시무룩해졌다.


나는 본래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이기보다는 마음을 따라가곤 하는 P형 인간이다.º  어차피 인생은 예측할 수 없는 변수의 연속이니까 굳이 철저하게 계획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먹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저 순간의 입맛이 당기는 곳에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그렇게 우연히 먹은 음식이 맛있으면 역시 난 감이 좋다며 우쭐하며 성공의 맛에 취해 있기를 좋아했다. 물론 맛없는 때도 있었지만, 대개 그럴 때는 실패를 통해서 내가 싫어하는 맛을 배울 수 있다며 위로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이 회전초밥집은 그렇게 위로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버렸다. 내 취향을 학습할 수 있는 레슨비 치고는 비쌌기 때문에!

º P형, J형: MBTI 성격유형에서는 생활양식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P형은 인식형(Perceiving)으로,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유연하게 선택한다. J형은 판단형(Judging)으로,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선택한다.


실망감은 곧이어 나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는데, '왜 나는 검색 한 번 해보지 않았지? 한 번이라도 찾아보고 왔다면?' 하는 생각이 들어 그제야 포털사이트에 검색해봤다. (심지어 내가 방금 다녀온 가게 이름도 몰라서 영수증에 적힌 상호명을 힐끗 봐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사람이 별로였다고 평을 남겼고, 작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인생을 관통해온 P형의 철학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더는 적고 소중한 돈을 이렇게 공중에 날리지 않기 위해 점차 J형 인간으로 변해갔다. 심심하면 지도 앱에서 식당을 하나하나 눌러보며 후기를 확인하고 괜찮아 보이는 곳에 별표를 해놓는다거나,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면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찾고는 후보지를 쫙 보내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맛있을까 맛없을까 떨려하던 재미와는 또 다른 계획이 착착 맞아떨어질 때의 재미도 알게 됐다. 


그래서 내가 완전히 J형 인간으로 바뀌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여전히 순간순간의 내 느낌이나 생각을 포착해서 그대로 따르길 좋아하는 P형 인간이지만 먹을 때만큼은, 특히 가격대가 좀 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 아주 잠깐 ‘먹플랜’을 짜는 J형 인간이 된 것뿐이다. 인생의 변수는 내가 예측할 수 없지만, 맛의 성패는 데이터로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으니까! 


사실 이렇게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행위 자체가 P형 인간에게는 부담되는 일이지만, 사전 조사를 하면 성공적인 식사를 하게 되는 빈도가 더 높아지기에 피곤함쯤은 감수할 수 있다. 비싸고 맛없는 걸 먹었을 때의 실망감보다는 검색하는 피곤함이 더 견딜만하므로. 이상, 회전초밥이 선사한 쓰라린 실패의 경험으로 지도 앱 속 500여 개의 식당에 별을 표시하게 된 사람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 정재민


정재민 @jam.in

먹고 마시기 위해 사는 사람. 직장인들이 슬기롭게 점심시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점심 메뉴와 대화 소재를 추천해주는 뉴스레터 <슬기로운 점심시간>을 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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