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니까 양념치킨 먹고 싶어."
양념치킨이라, 아무래도 아플 때일수록 먹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음식 같은데. 아프면 죽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말리는 나에게 남편은 재차 애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프면 양념치킨 먹었어. 옛날 양념치킨 스타일로 처갓집 어때?"
나는 강경한 프라이드치킨 파다. 애써 바삭하게 튀겨 놓은 것을 다시 양념에 담가서 축축하게 만들어 먹는 행위는 그저 미스테리일 뿐. 매콤달콤한 소스의 맛을 즐기는 것일수도 있다지만, 그렇다면 프라이드치킨을 양념 소스에 찍어먹으면 될 일 아닌가? (그래, 나는 탕수육도 찍먹파다... 볶먹이 없다는 전제 하에.) 게다가 양념치킨은 손으로 먹은 뒤 휴지에 닦으면 휴지 잔여물과 진득한 양념이 한데 엉켜 묻어나고, 흐르는 물에 한참이나 손을 씻어야만 냄새가 가신다. 양념치킨은 이래저래 프라이드치킨에 비해 맛도 효율도 떨어지는 것이다.
남편과 치킨 1.5마리를 주문하기 위해 배달 앱을 켠 적이 있다. 반마리 추가도 된다며 요즘의 발전한 치킨 문화를 찬양하던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한마리분의 치킨으로 프라이드를 시킬지 양념을 시킬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연인들의 말다툼이 으레 그렇듯 치킨으로 시작했던 대화는 '너의 것을 나에게 얼마나 양보할 수 있는지'를 놓고 애정의 크기를 재단하려 애쓰는 싸움이 되었다. 뜨거운 기름처럼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견디지 못한 나는 그에게 "너는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냥 소스 맛으로 치킨을 먹는, 진짜 치킨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라고 외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남편은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본연의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보통 음식을 논할 때 가장 최상급의 표현으로 꺼내곤 하는 '본연의 맛'을 오로지 자신의 입맛만을 근거로 부정해버리다니.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쉽게 뱉어 버리는 그의 자신감 때문에 나는 대화를 이을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어떤 치킨을 좋아하느냐를 떠나서, 이 사람과는 끝내 통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걸 직감했달까. 우리는 칸을 사이에 두고 분명히 나뉘어진 치킨처럼 비슷해보여도 분명히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결국 각자 한 마리씩의 치킨을 주문했다. (그리고 두 마리는 너무 많아 남겼다...)
분명 그랬었는데, 양념치킨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부터 아프면 먹었던 음식'이라서라는 거지. 이로써 모든 게 명징해진 것 같았다. 나도 알지, 그 맛.
불룩하게 솟은 윗부분을 노란 고무줄로 엉성하게 고정시킨 얇은 종이 재질의 치킨 박스, 튀김에서 뿜어지는 열기와 흥건한 양념 때문에 점점 축축하게 늘어지던 그 옛날 치킨 박스. 요즘의 프랜차이즈들이 제공하는 단단하고 견고한 치킨 박스에 비교하면 정말 보잘것 없었지만, 그 허접한 모양새에 굳이 눈길을 둘 틈은 없었다. 헐겁게 벌어진 박스 틈새에서 고소한 튀김 냄새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으니까. 허겁지겁 고무줄을 풀어내고 호일을 젖히면 진한 다홍색의 양념 위에 깨가 솔솔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치킨의 자태가 드러났다. 다리를 크게 한입 베어불면 꾸덕하고 달큰한 양념이 혀를 찌릿하게 달궜다. 게다가 케요네즈(케첩+마요네즈)를 듬뿍 묻힌 양배추 샐러드는 또 어떻고!
물론 그 행복이 유지되는 건 2조각까지였다. 양념치킨은, 더더군다나 튀김옷이 더욱 얇았던 옛날 양념치킨은 '튀김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바삭한 프라이드치킨과는 다르게 흥건한 양념에 젖어 눅눅했고, 소스는 쉽게 물리기 마련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적어도 양념치킨이 줄 수 있는 2조각 어치의 행복은 알았다. 나는 웃으며 아픈 남편의 부탁을 들어줬다. 처갓집에서 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시켰다는 뜻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반반치킨'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김혜경 @hkyoe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 마십니다. 『아무튼, 술집』, 『시시콜콜 시시알콜: 취한 말들은 시가 된다』를 썼습니다. 시 읽으며 술 마시는 팟캐스트 <시시알콜>에서 술 큐레이터 DJ풍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신 것은 적당한 영양소와 많은 똥으로 분해되어 사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믿습니다.
"아프니까 양념치킨 먹고 싶어."
양념치킨이라, 아무래도 아플 때일수록 먹지 말아야 할 것 같은 음식 같은데. 아프면 죽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말리는 나에게 남편은 재차 애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프면 양념치킨 먹었어. 옛날 양념치킨 스타일로 처갓집 어때?"
나는 강경한 프라이드치킨 파다. 애써 바삭하게 튀겨 놓은 것을 다시 양념에 담가서 축축하게 만들어 먹는 행위는 그저 미스테리일 뿐. 매콤달콤한 소스의 맛을 즐기는 것일수도 있다지만, 그렇다면 프라이드치킨을 양념 소스에 찍어먹으면 될 일 아닌가? (그래, 나는 탕수육도 찍먹파다... 볶먹이 없다는 전제 하에.) 게다가 양념치킨은 손으로 먹은 뒤 휴지에 닦으면 휴지 잔여물과 진득한 양념이 한데 엉켜 묻어나고, 흐르는 물에 한참이나 손을 씻어야만 냄새가 가신다. 양념치킨은 이래저래 프라이드치킨에 비해 맛도 효율도 떨어지는 것이다.
남편과 치킨 1.5마리를 주문하기 위해 배달 앱을 켠 적이 있다. 반마리 추가도 된다며 요즘의 발전한 치킨 문화를 찬양하던 것도 잠시, 우리는 이내 한마리분의 치킨으로 프라이드를 시킬지 양념을 시킬지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연인들의 말다툼이 으레 그렇듯 치킨으로 시작했던 대화는 '너의 것을 나에게 얼마나 양보할 수 있는지'를 놓고 애정의 크기를 재단하려 애쓰는 싸움이 되었다. 뜨거운 기름처럼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견디지 못한 나는 그에게 "너는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그냥 소스 맛으로 치킨을 먹는, 진짜 치킨이 뭔지도 모르는 놈!"이라고 외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남편은 호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본연의 맛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아니 어떻게 그런 말을? 보통 음식을 논할 때 가장 최상급의 표현으로 꺼내곤 하는 '본연의 맛'을 오로지 자신의 입맛만을 근거로 부정해버리다니. 나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말을 쉽게 뱉어 버리는 그의 자신감 때문에 나는 대화를 이을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어떤 치킨을 좋아하느냐를 떠나서, 이 사람과는 끝내 통하지 못할 부분이 있다는 걸 직감했달까. 우리는 칸을 사이에 두고 분명히 나뉘어진 치킨처럼 비슷해보여도 분명히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결국 각자 한 마리씩의 치킨을 주문했다. (그리고 두 마리는 너무 많아 남겼다...)
분명 그랬었는데, 양념치킨을 좋아하는 이유가 '어렸을 때부터 아프면 먹었던 음식'이라서라는 거지. 이로써 모든 게 명징해진 것 같았다. 나도 알지, 그 맛.
불룩하게 솟은 윗부분을 노란 고무줄로 엉성하게 고정시킨 얇은 종이 재질의 치킨 박스, 튀김에서 뿜어지는 열기와 흥건한 양념 때문에 점점 축축하게 늘어지던 그 옛날 치킨 박스. 요즘의 프랜차이즈들이 제공하는 단단하고 견고한 치킨 박스에 비교하면 정말 보잘것 없었지만, 그 허접한 모양새에 굳이 눈길을 둘 틈은 없었다. 헐겁게 벌어진 박스 틈새에서 고소한 튀김 냄새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으니까. 허겁지겁 고무줄을 풀어내고 호일을 젖히면 진한 다홍색의 양념 위에 깨가 솔솔 뿌려진 먹음직스러운 치킨의 자태가 드러났다. 다리를 크게 한입 베어불면 꾸덕하고 달큰한 양념이 혀를 찌릿하게 달궜다. 게다가 케요네즈(케첩+마요네즈)를 듬뿍 묻힌 양배추 샐러드는 또 어떻고!
물론 그 행복이 유지되는 건 2조각까지였다. 양념치킨은, 더더군다나 튀김옷이 더욱 얇았던 옛날 양념치킨은 '튀김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는 바삭한 프라이드치킨과는 다르게 흥건한 양념에 젖어 눅눅했고, 소스는 쉽게 물리기 마련이었으니까. 어쨌거나 나는 적어도 양념치킨이 줄 수 있는 2조각 어치의 행복은 알았다. 나는 웃으며 아픈 남편의 부탁을 들어줬다. 처갓집에서 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시켰다는 뜻이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반반치킨'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김혜경 @hkyoe
회사 다니고 팟캐스트하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술 마십니다. 『아무튼, 술집』, 『시시콜콜 시시알콜: 취한 말들은 시가 된다』를 썼습니다. 시 읽으며 술 마시는 팟캐스트 <시시알콜>에서 술 큐레이터 DJ풍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신 것은 적당한 영양소와 많은 똥으로 분해되어 사라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