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걸로, 한 잔 더]#6 동태탕 먹는 사람들 / 임유청

2021-11-24



젖은 나비처럼 지치는 날이 있다. 해코지 한 번 당하지 않았는데도 종일 넘어지기만 한 기분이 드는 날, 실수 없는 마무리를 하고도 텅 빈 기분이 드는 하루. 생일에도 출근을 하듯 그런 날에도 퇴근을 한다.


집 앞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린다. 이 신호만 건너면 컵라면에 뜨거운 물 부어 먹고 침대에 들 생각이다. 딱딱한 입꼬리와 얼얼한 발뒤꿈치를 느끼며 신호가 바뀌는 60초 같은 1분을 기다린다. 길 건너 동태탕 집이 눈에 들어온다. 딱히 맛집은 아닌데, 1인분만 시켜도 부루스타에다 끓여주더라. 누군가 지나가듯 한 말을 기억해낸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뀐다. 나는 바람에 등 떠밀린 낙엽처럼 길을 건너서 가게 문을 민다.


TV가 잘 보이는 4인용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가방을 풀고 외투를 벗으며 동태탕 1인분과 맥주 한 병을 주문한다. 재빨리 상이 차려지고, 작은 전골냄비가 나온다. 나박하게 썬 무 위에 동태 토막, 두부랑 콩나물 조금, 쑥갓이 수북이 올라가 있다. 중년의 여성 종업원이 '부루스타'를 찰칵 켠다. 나물 몇 가닥 얹은 맨밥을 씹으며 멍청한 표정으로, 우리는 왜 부루스타를 결코 가스버너라고 말하지 않는가 생각에 잠긴다. 탕이 끓는 동안 맥주를 마신다. 아직은 빈 테이블이 더 많은 시각, 사람들이 이른 저녁을 먹는다. 보글보글 탕이 끓는 소리, 테이블마다 가스 불 오르는 소리, 수저가 부딪히는 소리에 다른 손님들의 말소리가 잔잔히 섞여 든다.


옆 테이블 나이 든 모자가 수군수군 모의를 한다. 노모가 말한다. 남은 건 육수를 더 부어 달래서 포장을 해야겠다. 아들이 말한다. 어머니, 종업원에게 너무 심하게 말씀하지 마세요. 덤덤하게 덧붙인다. 제발요. 어머니가 말한다. 너는 암말 말고 있거라. 나는 잔뜩 긴장한다. 1인분을 새로 만들어 내라고 할 참인 걸까? 길 잃은 나그네 잡아먹을 궁리라도 엿듣는 기분이다. 종업원을 불러 세우며 늙은 어머니가 말한다. 여기 육수를 조금 부어서 싸 주시면… 뜻밖의 순한 목소리. 종업원이 노래하듯 말한다. 저희는 육수 아니고 물이어서요, 집 가져가서 물 부어 끓이시면 돼요. 모두가 만족한다. 저쪽에서 혼자 먹던 중년 남성이 자리를 턴다. 계산하며 말한다. 반찬 남은 거 싸주시고, 넣는 김에 아까 그 나물 좀 넉넉히 더 주면 안 되나요? 다른 데선 내가 가면 말 안 해도 밥을 두 공기를 줘요.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소릴 하며 그가 퇴장하고, 창가 자리에서 아까부터 소주를 마시던 중년 여성 셋이 바삐 움직이는 종업원 뒤통수에 대고 말한다. 아휴, 뭘 더 싸 달래? 나도 속으로 맞장구를 친다. 단정한 노인 한 명이 들어온다. 종업원이 살갑게 아는 체한다. 내장탕에 막걸리죠? 나는 할아버지가 막걸리 따르는 걸 곁눈질하며, 젓가락을 놀려 부드러운 두부를 반으로 가르고 콩나물이 푹 익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맵고 짠 국물과 함께 부지런히 밥을 입안에 밀어 넣는다.


좋을 것도 싫을 것도 없는, 누가 보면 가난하고 누가 보면 넉넉한 사람들이 5,500원짜리 동태탕을 먹는다. 문득 내가 이들에게 가여움도 미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 자신에게조차 그러하다. 종일 날 붙든 마음들-뭐든 다 잘하고 싶은 마음,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 이런 마음들이 없어도 내가 되는 건지 한 발짝 떨어져 날 쳐다보지만, 거기엔 그냥 동태탕에 맥주를 마시는 젊은 여자가 있을 뿐이다.


남은 밥까지 싹싹 긁어먹는다. 미지근해진 맥주는 미련 없이 남긴다. 소주 마시는 여자들 너머로 해가 저문다. 마을버스가 달린다. 늙은 강아지가 산책을 마친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탄다. 먹는 행위를 그칠 수 없듯 살아간다는 약간의 악행을 저지르는 일을 우리는 멈출 수 없다. 그러니 적당히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편이 좋다. 오늘은 이렇게 마친다.


ⓒ 임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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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청 @moriapt

영화 산업 가장자리에서 일하는 회사원. 퇴근 후 일과는 쓰거나 마시기. 영화 보고 술 마신 이야기 『테크니컬러 드링킹: 까마귀의 모음 2집』과 베를린 친구집에 놀러가서 술 마신 이야기 『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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