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유없는 술은 없다]#6 마이 골든 글러브, 흑맥주 / 김경윤

2021-11-17


골든 글러브. 한 해의 가장 좋은 성과를 낸 플레이어에게 주는 트로피. 월급쟁이인 나의 인생에 세상이 정의하는 골든 글러브는 평생 무소식이겠으나, 마치 골든 글러브처럼 맥주 한 잔이 빛나던 순간이 있었다. 오늘은 그 순간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크래프트 맥주 문화가 한국에서 빠르게 자리 잡던 6년 전, 나는 집 근처 한 수제 맥주 가게에서 이 세계에 눈을 떴다. 맥주는 물론이고 소맥 한 잔도 배가 부르다며 마지못해 마시는 사람은 세상에 정말 맛있는 맥주가 정말 다양한 스타일로 선보여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집 근처 탭하우스를 참새 방앗간처럼 들르며 맥주를 마시고, 맥주 양조를 직접 해보고, 관련 책을 사서 공부했다. 크래프트 맥주는 취미이면서 동시에 기회로 느껴졌다. 좋은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에서 마케터를 업으로 삼는 꿈이 생겼다. 열정과 마음은 이제껏 마신 맥주의 양만큼 무럭무럭 자라, 나는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남양주의 한 수제 맥주 회사로 이직했다. 덕업 일치의 의미를 얻는 대가로 연봉은 깎는 등가 교환의 형태로 말이다.


현실은 바로 찾아왔다. 당장 출퇴근이 만만치 않았고, 업무 환경부터 함께하는 사람까지 낯설었으며, 유일한 마케팅 직원으로 일을 시작해야 하니 제약이 컸다. 잘 한 선택일까 라는 질문이 나를 며칠 동안 파고들었다. 내가 너무 세상 물정이 없었나? 취미는 그냥 취미인 편이 좋은 것일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마케팅 직원인 나는 회사 SNS 계정에 업로드할 만족할만한 사진을 남양주에서는 얻지 못한 채 회사에서 운영하는 경복궁의 한 탭 룸으로 향했다.º  거기서도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보다가 그만 현타가 와서 텅 빈 눈으로 바에 앉았다.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매니저님이 갓 따른 맥주를 건네주셨다. 우리 브랜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모카 스타우트’라는 흑맥주라고 했다. 

º 탭 룸: 몇 개 이상의 탭(생맥주를 따르는 장비)을 운영하는 맥주 가게


흑맥주? 내게는 우선순위에서 하위권에 있는 맥주였다. 사실 처음 마셔보는 것이었지만 그전에 몇 번 마셔본 척 대답을 흐리며 잔부터 받아 들었다. 의심하며 마셨다. “와 진짜 맛있는데요?” 바로 진심이 튀어나왔다. 잘 볶은 보리의 고소함, 다크 로스팅한 원두커피를 마시는 듯한 풍미를 지나, 풍성한 탄산 감이 경쾌하게 느껴지는 맛있는 한 잔이었다. 분주히 그날의 오픈을 준비 중인 매장에서 홀로 그 맥주를 홀짝이며, 나는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이 회사, 망하지는 않겠구나!’ 취기와 함께 용기가 생긴 나는 감히 이런 다짐과 함께 새로운 삶에 제대로 둥지를 틀어보기로 결심했다. 이 맥주가 더 잘 되게 만들어야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만들어야지.


사람은 사람에게 구원이 될 수 없지만 어떤 술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끼면서 만난, 짙게 찰랑거리는 ‘골든 글러브’를 잊을 수 없다. 혹자는 맥주 한 잔에 무슨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느냐며 웃어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 한 잔의 맥주는 나의 설익은 도전에 화답하는 트로피 같은 존재였달까. 더 이상 나는 맥주를 업으로 삼지 않지만, 나는 나의 18번을 들으며 나만의 ‘골든 글러브’를 떠올린다. 그 한 잔이 나를 바꾸었다고 말하며.


 "마지막 순간에 난 다시 일어서, 내게 남겨진 시간을 준비하겠어. 아직도 게임은 끝나지 않았어, 뒤돌아설 일은 없어." -마이 앤트 메리, <골든 글러브>


ⓒ 김경윤



"이제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모두의 삶에 좋은 술과 이야기가 가득하기를!" 

-김경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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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윤 @casperk0816

이상주의와 먹고사니즘 사이, 적당한 타협점을 찾으며 살아가는 직장인. 집중력이 짧고, 기억력이 나쁜 탓에, 먹고/마시고/듣고/보는 유희적이고 직관적인 취미와 일을 선호한다. 구 맥주 브랜드 매니저, 현 커피 마케터. 모쪼록 열심히 살고, 기분 좋게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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