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유없는 술은 없다]#5 서툰 만남들을 위하여, 사이더 / 김경윤

2021-11-03


사람과 소통하는 것이 업이지만 사실 나는 대인 공포감이 퍽 심하다. 타인이 나의 사정거리에 있다는 느낌 자체가 자극이어서, 작든 크든 몰아치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소란을 느끼고 분위기로 뿜어내는 비언어적 표현에도 마음이 곤두선다. 자극과 소란이 없는 ‘혼자인 나’가 가장 나의 자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변화가 생긴 건 술에 취미가 생긴 이후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등 다가올 만남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대신, ‘오늘은 삼겹살에 소맥 마시는 날’, ‘오늘은 바에서 다이키리 마시는 날’로 술을 주인공으로 둔다. 만나는 사람을 만남의 조연으로 생각하니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되었고, 차츰 관계를 이어가는 데에 익숙해졌다. 내 안의 변화가 타인들에게도 느껴진 것인지, 이따금, 지인들로부터 나와 함께 있을 때 편하다, 즐겁다는 말도 듣게 되었다.


이런 나에게 가장 어려운 만남은 바로 ‘술을 잘 마시지 않는 이와의 저녁 약속’이다. 수 2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미적분을 풀 수 없다. 그리고 내 약속의 주인공은 술이다. 술이 없는 자리로 나가야 한다는 건 애초에 약속의 전제조건부터 성립되지 않는달까? 그런 이들과 만날 일정을 잡을 때면,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걱정이 스미고 고려해야 할 조건이 생겨난다. 길어도 2시간 이상은 못 만날 것 같고, 만나는 이의 추억 사전을 꺼내 이야기보따리를 미리 준비해야 할 것 같고, 무엇보다 맨 정신으로 타인의 자극에 기민하게 반응할 나를 상상한다.


아직도 내게 남아있는 작은 공포를, 사람들도 눈치챈 것일까? “경윤아,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데 너랑 만나려면 술 한 잔은 해야 할 것 같아. 추천해줄 곳이 있어? 나 때문에 네가 불편해지는 건 싫어서 그래.” 나는 몇 번이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 알코올 중독자처럼 보이는 이 상황(맞지만)! 그깟 술이 뭐라고, ‘술이 없어도 저녁의 대화는 무리가 없어야 한다’는 자책감이 들지만, 그것도 잠시. 사실은 기쁘다. 짐짓 고민하는 반응을 보이다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제안한다. 


“미안해, 술도 잘 못하는 네가 나 때문에 고생이네. 생각해봤는데 혹시 사이더라고 알아?”


사이다를 마시자고 속이는 것이 아니다. 사이더는 엄연한 술이다. 사과나 배를 발효하여 만든 과실주로, 도수 5-7%의 맥주와 비슷한 정도의 알코올을 지녔지만 술맛은 거의 나지 않는다. 뽀글대는 기포가 입 안을 톡톡 두드리고 달콤한 과실 향이 퍼지면서 입을 즐겁게 한다. 베이스 사이더에 블루베리, 홉, 오이 등 다양한 부재료를 넣으면 또 다른 맛의 사이더가 탄생한다. 음료인 척 관심을 끌지만, 스파클링 와인의 리추얼을 지녔으며, 크래프트 맥주의 재미를 더한 술. 오늘의 만남에 이보다 적합한 술은 없으리라.


사이더를 판매하는 맥주 가게에서 메뉴판을 보며 물음표만 가득한 친구에게 한 잔의 사이더를 추천한다. 걱정하며 한 모금 마신 친구가, 갓 따른 사이더를 맛본 후 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저녁이 시작된다. 술을 즐기지 못하는 이는 사이더 한 잔으로, 나는 함께 사이더로 시작해서 크래프트 맥주를 두어 잔 더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감각은 느슨해지고, 대화는 많아지고, 감정은 연결된다. 그렇게 예정된 두 시간을 훌쩍 넘긴 만남을 뒤로하며 헤어지는 길, 나는 하나의 만남이 무사히 이루어졌음에 대한 안도감과 즐거움을 느끼며 밤을 마무리한다.


그간의 서툰 만남들에 소정의 알코올로 함께해주던 사려 깊은 이들에게 감사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면, 그때도 사이더로 치얼스!



ⓒ 김경윤



김경윤 @casperk0816

이상주의와 먹고사니즘 사이, 적당한 타협점을 찾으며 살아가는 직장인. 집중력이 짧고, 기억력이 나쁜 탓에, 먹고/마시고/듣고/보는 유희적이고 직관적인 취미와 일을 선호한다. 구 맥주 브랜드 매니저, 현 커피 마케터. 모쪼록 열심히 살고, 기분 좋게 잡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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