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걸로, 한 잔 더]#4 단골손님의 자세 / 임유청

2021-10-27


나만의 방을 갖기 위해 지방 소도시의 가족 집을 떠나 서울로 왔건만, 오로지 나 혼자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을 갖기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하는 공유 공간 한켠에 책상 하나, 이불 한 채 들인 채 살고 있었다. 보증금과 월세를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서였다. 집을 나눠 쓴 이들은 다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의 존재가 불편해지는 때가 종종, 하지만 필연적으로 온다는 걸 의미했다.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 인간적 차원에서 꽤 서글프게 여겨졌다면, 내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인간적 요소들은 날 분노케 했다. 바로 옆 건물 카페에선 모난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더 거슬리는 재즈를 틀고, 근처 고깃집에선 숯과 불과 재의 연기를 피워댔다. 끊이지 않는 공사 소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혼자라고 느끼려면 물리적 적막이 필요하다는 걸, 고독에도 오감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하지만 방도가 있나. 불편할 때마다 이사할 수는 없는 일.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살만해졌는데, 포기해서 편한 줄로만 알았더니 실은 나름의 생존법을 찾고 있었나 보다. '본 집'에서 피신해야 할 때를 대비한 '위성 집'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던 거다. 이 사실을 깨우친 건 매일 드나들던 단골 위스키바 주인이 놀리듯 한 말 때문이었다. 내가 이 가게를 마치 내 집 거실처럼 여긴다는 거다. 과연 그랬다. 누군가가 깔끔하고 아늑하게 꾸려가는 공간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허기를 채우고, 사람을 만나고 때론 홀로 쉬기도 하며 내 집 같은 평온함을 누리고 있었던 거다. 좋아하는 친구,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면 꼭 여기로 데려와 마치 응접실에 초대라도 한 듯 가게의 이모저모를 설명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니 더욱 그랬다.


내 마음속에 조용히 위성 집으로 지정된 단골집들을 떠올려본다(사장님들은 모른다). 퇴근 후 친구들과 앞다퉈 하루 일을 떠드는 작은 와인바, 노트북에 코 박았다 고개 들면 구매욕을 자극하는 램프며 유리잔이 반짝여, 돈이나 벌어야지 하며 다시 일하게 되는 카페, 사시미에 위스키를 주문하는 동안 어릴 때 듣던 브릿팝이 나오는 선술집, 강남에서 미팅을 한 날이면 혼자 느긋하게 한잔하러 들르는 먼 동네의 이자카야. 이젠 기억에서만 찾아갈 수 있는 단골집들도 회상해본다. 내가 근거지를 옮겼거나 그 가게가 문 닫은 이유로 이제는 갈 수 없는 나의 옛집, 나의 단골집들. 그곳들은 사라진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음이 쉬어갈 공간을 내어준다.


주인과 손님은 서비스와 돈을 서로에게 제공하는 관계지만, 동시에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지금 이 순간의 동반자이며 이 공간의 동거인이다. 기껏 섭외한 내 위성 집에서 지금처럼 계속 환대받고 싶은 나는 좋은 손님이 되려 노력한다. 공동생활수칙이라도 짜듯 몇 가지 원칙도 세웠다. 먼저, 날 기억해주길 바라지 않는다. 주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말을 걸지 않는다. 다른 손님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며 터줏대감인 양 굴지도 않는다. 앉았던 의자는 집어넣고 떠난다. 술에 취해 잔을 깨거나 신청곡을 강요하지 않는다(실제로 후자는 끊느라 꽤 고생했다). 영업시간 끝났는데 딱 한 잔만 더 하겠다고 떼쓰지 않는다(이 버릇은 코로나 때 싹 고쳤다) 등등. 솔직히 매번 성공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주인들의 너그러움에 기대어 그럭저럭 진상까지는 안 갔다고 볼 수 있으니, 다시 한번 단골집 아니면 내 쉬어갈 곳 어드메일까 싶다.


작년에 추가된 목표도 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길 수 있도록 손님으로서 할 수 있는 걸 한다, 이다. 기억만이 아닌, 내 몸과 마음이 여전히 그곳에 속해있을 수 있도록 내 또 다른 집의 주인들이 조금만 더 힘내주셨으면 한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언젠가는 좋은 손님이 될게요.


ⓒ 임유청




임유청 @moriapt

영화 산업 가장자리에서 일하는 회사원. 퇴근 후 일과는 쓰거나 마시기. 영화 보고 술 마신 이야기 『테크니컬러 드링킹: 까마귀의 모음 2집』과 베를린 친구집에 놀러가서 술 마신 이야기 『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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